새벽 5시 반이 되니 멀리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리고 여명이 밝아오는 기미가 느껴져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작은 손전등에 의지하여 밖으로 나갔다. 밖은 아직 칠흑 같은 어둠에 싸여 있었지만, 바로 집 옆에서 동물들의 소리가 정겹게 들려왔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것은 소와 염소?양의 무리였다. 아! 그것이 바로 그들의 진정한, 소유다운 ‘소유’였던 것이다. 마사이족들에게 가축은 그들의 가장 소중한 ‘소유’이며, 가축을 지키기 위해 그들의 생명을 거는 일이 다반사라는 사실이 생각나면서 이들의 삶도 결코 존재지향적이지만은 않다는 새로운(?) 사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결국 소유지향적이냐, 아니면 존재지향적이냐 하는 것은 얼마나 그 가치에 집착하느냐에 달린 것이지 소유의 많고 적음과는 비례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소유가 많으면서도 존재지향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소유가 적으면서도 소유지향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날이 완전히 밝자 자동적으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집에서 나와 자기의 생활을 시작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위클리프가 권하는 차이(이들이 매일 아침저녁으로 마시는 우유와 차를 혼합한 전통차)를 한 잔 마시고 나서 나도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기 위해 그 집을 나섰다.
그날 저녁, 안찬호 선교사님은 우리팀에게 ‘지식’과 ‘지혜’의 차이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다. 요약해 보면, 지식은 스스로 안다고 하는 것이며 인간이 노력해서 얻는 것이고, 지혜는 스스로 모른다고 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것이다. 지식은 차가운 것이며 머리를 써서 얻지만, 지혜는 따뜻한 것이며 가슴으로 받는 것이다. 지식은 가지려 하고 높아지려 하는 것이지만, 지혜는 나누어 주려 하고 낮아지려 하는 것이다. 나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소유지향의 삶은 지식을 추구하고, 존재지향의 삶은 지혜를 추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날도 나의 묵상은 계속되었고, 소유지향의 삶은 ‘즐거움(pleasure)’을 추구하고, 존재지향의 삶은 ‘기쁨(joy)’을 추구한다는 것도 새로이 깨닫게 되었다. 즐거움은 우리가 운동(등산, 골프 등), 여행, 사교모임, 공연관람 등과 같은 행위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데, 이러한 행위들은 우리의 노력과 재화(비용)를 필요로 하며, 일시적인 만족을 제공한다. 그리고 즐거움은 소유와 마찬가지로 점점 더 큰 것을 추구하는 속성을 가진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원하던 소유나 즐거움이 충족되었을 때 그 다음번에는 더 큰 소유나 더 큰 즐거움을 얻어야 비로소 만족하게 된다. 이에 비해 기쁨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살 때 하나님께서 값없이 부어주시는 것으로, 우리의 노력과 재화를 별로 필요로 하지 않으며, 지속적인 만족을 제공한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을 경험해 본 사람은 보다 작은 것이나 보다 사소한 일에서도 기쁨을 발견하게 되므로 그의 삶은 점점 더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된다.
앞서 말했듯이 에리히 프롬은 (환경파괴, 전쟁, 기아문제와 같은) 현대산업사회의 각종 위기들이 인간 개개인이 소유지향적인 삶을 추구하기 때문에 발생되는 것이라고 결론지으면서 “현대산업사회의 병폐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 개개인이 소유지향적인 삶을 버리고 존재지향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그는, 존재지향적인 삶을 살 때 현대사회의 병폐가 치유되는 이유는 밝히지 않았는데(아니면 못했는데), 그것은 왜일까?
그에 대한 답은 프롬의 개인사를 차근차근 되돌아보면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하다. 에리히 프롬은 유대인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나이 33세인 1933년 나치가 등장하자 곧바로 미국으로 망명하여 귀화였고 유대교를 추종하지 않았다. 그는 성경과 예수의 가르침에 많은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그의 삶에서 기독교를 진리로 받아들인 적은 결코 없었고, 그의 저서를 보면 오히려 불교의 ‘무소유’ 사상에 상당히 심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참고: ‘소유냐 존재냐’ p93, 94). 나는 바로 이러한 점이 그가 더 이상 그 자신의 사고의 범위를 더 근본적인 방향으로 넓히지 못한 이유라고 판단했다.
그에 비해 나는 존재양식의 삶이 바로 하늘나라의 실존원리임을 깨달았다. 그 근거는 첫째로, 주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신 하늘나라는 영적인 세계로 아무리 그곳이 아름다운 각종 보석과 진주와 정금으로 장식되어진 곳이라 하더라도(계 21:18~21), 그곳은 물질을 소유하는 것과는 무관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어 해나 달의 비침조차 쓸모가 없는 곳(계 22:23)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세상 나라는 소유양식이 지배하는 곳으로 우리는 생존을 위해 노력하여 물질을 나의 것으로 ‘소유’하여야 한다. 그리고 육체적 욕구가 만족되면 추가로 명예와 권력을 ‘소유’해야 정신적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다.
둘째로, 하나님은 모세의 질문에 ‘스스로 존재하는 자(I am who I am.)'라고 대답하신 바로 ‘존재 그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존재양식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따라 산다는 것이요, 창조의 원리를 회복하는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지으신 온전하고 아름답던 세계가 인간의 죄로 파괴되고 변질되었음을 인정한다면, 하나님 나라의 원리로 사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이 세상의 각종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실존원리인 존재양식으로 살 때, 우리는 가난 속에서도 풍요로움을, 환난 속에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다. 평수가 작은 아파트에 살아도 큰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에게 주눅들지 않으며, 통장의 잔고가 별로 없어도 불안해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의 또 다른 특징은, 명절 연휴나 정년퇴임 후와 같이 시간이 지나치게(?) 많이 주어졌을 때 불안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은 성경 책 한 권과 찬양집 한 권만 가지고도 하나님과 더불어 은혜 충만한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인데, 이는 존재양식의 삶을 산다는 것은 모든 존재의 원천이신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지혜와 기쁨 속에서 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리가 이 세상의 실존원리인 소유양식에 치우쳐 산다면 우리는 재물과 명예와 권력과 즐거움을 ‘소유’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고, 우리가 원하는 수준의 소유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불안을, 그리고 우리가 소유한 재물이나 명예를 잃었을 때는 심한 두려움에 시달리게 된다. 그리고 앞의 예와는 정 반대의 경우로, 이들은 시간이 많이 남아도는 상황에서 원인 모를 불안함을 느끼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TV의 전원을 켜거나, 시간을 함께 때워 줄 친구들을 찾아 나서거나,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경우에는) 해외 골프여행을 계획하게 된다. 이들의 특징은, 생명의 원천이요 끊이지 않는 생수의 강이신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지 않기에 매순간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쟁취해 나가야 하므로 내적인 평안이 없다는 것이다.
이제 결론을 내려야 할 때인 것 같다. 지금까지 묵상한 결과로 우리는 ①소유지향의 삶보다는 존재지향의 삶을 살아야 하며, ②무소유가 아닌 ‘참소유’의 삶을 살아야 한다. 참소유의 삶이란, 우리의 모든 소유가 우주만물의 참주인이신 창조주로부터 위임받은 것임을 인정하고 ‘청지기적인 삶’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소유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우리에게 지혜와 기쁨과 평안이라는 하늘의 선물을 끊임없이 공급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부분적으로라도 체험하며 사는 유일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