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위클리 피플/주간인물에 소개된 김현철 원장님 인터뷰기사 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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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청담서울성형외과 | 작성일 | 2013-08-01 | 조회수 | 2566 |
위클리 피플/주간인물에 소개된 김현철 원장님 인터뷰기사 입니다. 이선진 기자 = 사랑의 빚을 그리스도의 인술로 베풀다 김현철 청담서울성형외과 원장 / 의학박사 병원에 대한 소개와 박사님에 대한 자랑을 좀 어필해 달라는 기자의 말에 그는 손사래를 쳤다. 인터뷰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이거니와 인터뷰를 통해 크게 병원을 홍보하고 싶지는 않다는 입장에서였다. 그러나 그의 이력으로 알 수 있듯,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박사 출신에 다년간의 수술 실력과 노하우로 결과로써 입증 받은 그를 국내 성형외과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터. 병원 홍보나 광고 없이 환자들의 입소문만으로 인지도 높은 김현철 원장은 온유한 성품에 겸손하기까지 했다. “제가 만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제가 받은 풍성한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편안한 인상에, 더구나 성형외과 의사에게 ‘뭔 큰 굴곡이 있으랴’ 생각했던 기자의 짐작과는 달리 그의 삶은 굴곡진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삶은 한 가지 사건으로 명백히 구분 지을 수 있는데, 그 일대변혁을 일으킨 사건은 바로 그가 ’하나님을 만나게 된 이야기’다. 하나님을 믿고 난 후 그가 얼마나 감사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지. 그의 표정이 말을 해주는 것 같다. 참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다. 시간 가는 줄 모르게 3시간 남짓 이어졌던 취재는 길었던 시간만큼이나 오랜 여운이 남는 인터뷰였다. _취재 이선진, 하여라 기자 / 글 이선진 기자 위기도, 실패도 하나님의 뜻하심이었다 “서울대학교 성형외과 교수로 1997년까지 재직하다가 1998년에 개원을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개업을 하면 정말 잘 될 때였습니다. 처음에는 보라매병원 앞에서 시작하여, 후에 압구정동으로 옮겨갔습니다. 후배들과 함께 ‘서울성형외과’라는 브랜드로, 압구정을 비롯한 전국 7곳에 프랜차이즈 형태의 성형외과를 차렸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양악수술을 서울성형외과가 당시 개업가 중에서는 처음으로 시행했죠.” 2003년까지 압구정동에서 크게 잘 되었던 병원은 후배들과의 동업이 깨지면서 2005년 청담역 근처인 지금의 자리에서 새로이 개원을 하게 된다. ‘청담서울성형외과’가 개원된 배경이다. 청담동으로 옮긴 이후로 자연스럽게 안면윤곽 보다는 눈, 코, 주름 성형 등에 주력하게 됐다. 성형외과 개원의 생활을 한지 10년이 지난 2007년 그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10년 정도 성형외과를 하다 보니 타성에 젖고 매너리즘에 빠졌습니다. 손재주가 좋아 성형외과가 적성에는 잘 맞았지만 하나 맞지 않는 것이 마케팅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홍보와 광고에 따라 크게 좌지우지되는 성형외과 개원은 그에게 갈등과 회의를 가져왔다. 지금까지 한 번도 실패를 몰랐던 그는, 성형외과보다는 의료 사업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통 큰 투자를 겁 없이(?) 하게 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갑자기 리먼브라더스 사태에 세계금융위기가 닥쳐오면서 몇 억의 계약금만 날리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사업다운 사업을 시작도 못하고 주저앉게 되자 그는 스스로를 자책하기 시작했다. “승승장구했던 지난날처럼 사업도 열심히만 하면 되리라 믿었던 자신감은 지금 생각해보니 교만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렇게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이상하게도 책장 안에 꽂혀있던 성경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 때부터 성경을 처음부터 통독하기 시작했고, 레위기에서 막혀 건너뛴 게 잠언과 전도서였는데, 그 말씀들이 다 저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2009년부터 자연스럽게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그는, 그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 중심에 거하는 삶을 살게 된다. 제2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성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을 느낀 그는 그가 다니던 ‘사랑의 교회’의 ‘성경대학’과 ‘교리대학’을 차례로 이수하였고, 1년에 60권에 달하는 기독교 서적들을 탐독하고, 즐기던 골프와 결별하는 등 ‘새로운 사람’으로 변모하였다. “Amazing Grace를 듣는 중에,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을 위해 나는 무엇을 했나 생각해보니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 때부터 의료선교활동을 하기 시작한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경험하게 된다. 기적의 삶을 체험하게 만들었던 ‘의료선교’ “제가 다니던 ‘사랑의 교회’에서 캄보디아 의료선교가 있어 신청을 했는데, 마감이 되었으니 내년에 오라는 답변이 왔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걸어 간절하게 부탁하니 정 그러면 비행기편을 알아보고 연락을 주겠다는 겁니다. 마침 자리가 하나 나게 되었고 저는 선교 교육도 받지 않은 채 마음만으로 동참을 하게 되었습니다.” 성형외과 의사가 의료선교에 가서 무엇을 하겠냐는 우려와 눈초리도 잠시, 그가 첫 의료선교를 떠난 2011년은 감사하게도 그를 위한 선교의 해가 되었다. 그 전 해에만 해도 없었던 혹이 난 환자들과 손을 크게 다친 환자 등이 몰려 왔기 때문. 김 원장은 선교를 다녀온 후 성형외과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달란트라는 걸 깨달았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저 스스로 가치 없이 버리려 했던 것을 깨닫고는 깊이 회개했습니다. 지금은 제게 주신 귀한 달란트를 가지고 사람들을 위해 일할 수 있음에 기쁘고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환자들을 도우며 살고 싶습니다.” 그에게 의료선교 중 기억에 남는 장면이 무엇인지 물었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심성이 착하고 복음을 전하면 잘 받아들이는데, 그곳 사람들은 수많은 잡신들을 섬기는데다가 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절을 들어가야 해서 복음을 전해줘도 뿌리를 내리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려면 학교를 세워야겠다고 생각한 선교사님이 구입한 학교부지에 가게 되었지요. 그 땅을 밟으며 서너 바퀴쯤 도는데, 약간의 비가 뿌리더니 부지 위로 쌍무지개가 뜨는 겁니다.” 기자에게 건넨 김 원장의 사진을 보니, 의료선교팀 한 명이 두 팔 벌려 환호하는 뒷모습과 쌍무지개가 어우러진 모습은 그야말로 천국과 같은 모습이었다. 의료선교를 갈 당시, 개인적으로 김 원장은 매우 힘든 시기에 있었다. 사업 실패로 인한 소송과 다른 두 가지의 소송이 한꺼번에 몰려든 때였고, 그는 광야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캄보디아 의료선교를 다녀온 후 그는 마음에 크나큰 위로를 받고 왔다. 의료봉사의 가장 큰 수혜자는 바로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의료선교를 가서 보니 이 지구상에서 ‘우리보다 훨씬 어려운 사람들이 많구나’ 라는 것을 직접 확인했습니다. 우리의 삶이 힘들어도, ‘적어도 우리는 도울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소송이라는 것도 겪어보니 이기고 지는 것을 떠나서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는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지나고 보니 잘 나가던 병원의 동업이 깨지게 된 것도, 성형외과 개업이 지겨워졌던 것도, 사업이 어렵게 됐던 것도 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는 과정이었다는 걸 깨닫게 됐다. 문득 김 원장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시나요?”라며 기자에게 질문을 건넸다. “그럼요. 믿습니다.” 확신에 찬 기자의 답변이었지만 도대체 무슨 근거로? 김 원장은 ‘리 스트로벨’의 ‘부활의 증거’란 책을 선물로 주며 “구체적, 역사적 사건으로 믿으라.”, “과학적 근거를 갖고 믿으면 신앙이 저절로 깊어진다.”고 말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내공이 느껴지는 말들이었다. 의사라는 직업의 특성상 냉철함을 항상 유지해야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다년간의 노력이 담긴 색소폰 연주 CD를 기자에게 선물한 그는 작년에 색소폰 연주곡 2집을 냈다고 한다. 철인3종경기를 한 덕에 폐활량이 좋아 색소폰을 배우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알면 알수록 다양한 매력을 갖고 있던 그. 학창시절의 그는 어땠을까? “학창시절을 돌아보면 스키부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는데, 작년으로 50회 생일을 맞이한 서울대학교 스키부의 지난 50년은 아마추어 스키어들의 찬란한 도전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자세를 스키부에서 배웠습니다.” 서울대학교 스키부 20기였던 김 원장은 전국체전 노르딕 40km 계주 동메달을 비롯하여 전국 규모의 대회에서 수차례 메달을 딴 수상 이력이 있다. 서울대 스키부의 역사와 도전 정신을 담아낸 ‘서울대학교 스키부 50년의 이야기 - 멈추지 않는 도전!’ 이라는 책의 편집위원장으로도 활약한 김 원장은 그의 대학생활 추억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는 귀중한 책을 기자에게 선물해 주었다. 서양선교사들로부터 받은 ‘사랑의 빚’을 이제는 갚아야 할 때 김현철 원장은 얼마 전, 선천성기형 환자들의 의료지원과 개발도상국 의료진의 국내연수 지원에 써 달라며 1억원을 모교인 서울대의대에 기부했다. 그가 개발도상국 의료봉사에 각별한 뜻을 전한 이유는 무엇일까? “불과 6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는 세계 최빈국들 중 하나였지만, 현재는 세계가 부러워하는 강소국이 되었고, 이제 우리나라는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우뚝 올라섰습니다. 오늘의 한국이 있는 것은 수많은 서양선교사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헌신한 피땀과 눈물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 그가 기부한 금액은 ‘지정 기부금’으로 분류되어 있어 3년 안에 다 써야 한다고 하니 그가 뜻한 곳에 의미있게 쓰여지기를, 그와 마음을 같이 하는 이들이 곳곳에서 생겨나기를 바란다. 사회에 귀감이 되는 많은 봉사와 헌신을 다해온 그는 앞으로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현대사회가 글로벌 시대고, 곧 전 세계가 한 식구이니 저를 필요로 하는 환자들이 있다면 제가 가진 지식과 기술을 그들을 위해 쓰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는 이미 해외 선교사들과 연락망을 갖추어, 개발도상국의 의료 수준으로 해결이 안 되는 환자들을 병원으로 초청하여 무료로 정성껏 수술해주고 있다. 하나님을 만난 후로 특별히 기쁜 일이 없어도 항상 기쁨이 충만하다는 그. 의술을 인술로 베풀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널리 실천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보는 이마저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의 가치 있는 삶과 행보에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해서 차고 넘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Profile [학력] ㆍ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의학사) ㆍ의학석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원 성형외과 전공) ㆍ의학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예방의학 전공) [TRAINING 경력] ㆍ1988년 3월 ~ 1992년 2월 전공의 서울대학교병원 성형외과 ㆍ1996년 6월 ~ 1997년 9월 Visiting Scholar 미국 Standford대학 성형외과 (Maxillofacial Surgery 분야) [교육경력 및 기타 경력] ㆍ1992년 ~ 1997년 서울대학교병원 운영 보라매병원 성형외과 과장 ㆍ1994년 서울대학교의과대학 성형외과 임상강사 ㆍ1996년 서울대학교의과대학 성형외과 조교수 ㆍ1996년 ~ 1997년 미국 Stanford대학 성형외과 방문교수 ㆍ1998년 서울성형외과의원 개원 ㆍ2000. 10. 25 동아일보 성형외과 베스트병원 선정(안면윤곽부분) ㆍ2004년 대한민국 베스트닥터(이성주 著) 성형외과 부문 선정 ㆍ2002~2004년 대한미용성형외과학회 상임이사 ㆍ2005~2006년 서울대학교 성형외과 외래교수 ㆍ2010년 4월 ~ 2012년 3월 대한성형외과의사회 부회장 ㆍ現 청담서울성형외과의원(www.cdseoulps.com) 원장 <기사원본보기> |